프랑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고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큐비즘:Cubism)를 창시하고 발전시킨 조르주 브라크(George Braque, 프랑스, 1882~1963)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생애
브라크는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찾던 장소인 파리 근교의 센 강변에 위치한 아르장퇴이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택도장과 실내 디자인업을 하였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작업을 견습하고 조수로 도우면서 점차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5세 때인 1897년 르 아브르에 있는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 야간반에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1900년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이주해 아카데미 운베르에 다니면서 인상주의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폴 세잔의 "자연의 형태는 원추, 원통, 구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말에 크게 영감을 받은 브라크는 자신의 개성대로 입체주의 가능성을 차분하게 탐구했습니다.
1908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에스타크 풍경>을 보고 심사위원장인 앙리 마티스가 "조그만 입체 덩어리"라고 말한 것이 입체주의라는 용어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친분을 맺은 피카소와 공동 작업을 하며 세잔의 영향에서 벗어나 분석적 큐비즘으로 발전합니다. 1911년에는 오려낸 종이 조각들을 캔버스에 붙이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e) 기법을 선보이며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아갑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2번이나 훈장을 받기도 하였으나 1915년 머리에 부상을 입어 뇌수술을 받고 1년 동안 요양을 했습니다. 부상당한 이후에는 초기 입체파의 각진 날카로운 모양에서 탈피해 곡선을 이용한 보다 우아한 정물화를 많이 그렸고 디자인과 색상에서 화려함보다는 점점 포착하기 어려운 미묘함이 증대됩니다. 1961년에는 사후 60년이 지나야 전시를 열 수 있다는 관례를 깨고 살아 있는 미술가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작품
초기의 브라크는 야수파적 그림을 그렸지만 세잔과 피카소를 만나며 입체파의 창시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차분하게 대상을 분해한 브라크는 구성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으로 움직임을 분석해 낸 화가였습니다. 그는 단색조 계열의 색채를 사용해 정물을 일련의 평면과 모티브들로 해체했습니다. 그는 색조가 약한 연한 갈색, 회색을 주로 사용하여 사물의 여러 측면을 한꺼번에 2차원의 평면 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입체를 나타내는 것이 브라크의 전형적인 스타일입니다. 그의 작품 <벽난로 위의 럼과 클라리넷>을 보면 편지와 선, 삼각형, 사각형들이 아무렇게나 캔버스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화가가 무척 심사숙고하여 배치한 것들입니다. 선반 위에는 클라리넷과 럼 한 병이 놓여 있고 여기에 악보 한 장이 벽에 꽂혀 있습니다. 대상들은 무척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해체된 면들이 침착하게 한 곳에서 이루어지며 아주 특이한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빛과 그림자, 원근법을 이용해 캔버스 위에 공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면들을 한꺼번에 전시하는 것입니다. 브라크의 공간은 한 평면에서 3차원의 각 측면들과 깊이를 지적으로 조합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뜨겁고 과격한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비해 차분하고 이지적인 감각의 브라크의 입체주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맺음말
조르주 브라크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라는 혁명적 스타일을 연 동시에 정물화에도 주력했습니다. 그의 정물화는 농도가 낮은 색을 이용해 기하학적 형태를 보여주는 방식이었고,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법도 개발했습니다. "예술은 혼란을 야기하고, 과학은 안심시키려 한다. 한계를 벗어나면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라고 말했던 브라크에게 예술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