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주의의 창시자이자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프랑스, 1869~1954)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생애
본명은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Henri Emile Benoit Matisse)이고 프랑스 북부의 르 샤토 캉브레시에서 곡물업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미술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법률가를 지망했던 마티스는 1882~1887년에는 생캉탱의 중등학교에 다녔고, 파리에서 1년 동안 법률 공부를 하고 돌아와 생캉탱의 법률사무소의 서기로 일을 했습니다. 1890년 맹장염에 걸려 1년 가까이 요양 생활을 했는데, 이때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머니가 보내준 그림 도구로 유화를 그린 것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1년 그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가서 사립학교인 줄리앵 아카데미에 등록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892년에는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 되어 1899년까지 모로의 화실에서 공부를 계속합니다.
1896년 살롱전에 첫 출품하여 입선하고, 이후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그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회화 양식과 기법들을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폴 세잔,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등 여러 화가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1905년 앙드레 드랭과 처음으로 공동 전시회를 열었을 때 비평가들이 비꼬듯이 말한 '야수들'이라는 표현이 '야수주의'라는 하나의 미술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1907년부터는 피카소와 친구가 되어 작품을 교환하고 우정을 쌓았고 결국 이 두 사람이 20세기 예술을 바꾸어 놓은 대가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1941년 암 수술을 받은 후에는 그림을 그리기 힘들어 붓 대신 가위를 들고 '과슈를 칠한 종이 자르기'라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걸작들을 제작하였습니다. 1948~1951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쏟아 건축의 설계, 벽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모두 자신의 구상에 의한 로제르 드 방스성당을 완성했습니다.
작품
20세기 최고의 색채주의자였던 앙리 마티스는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과 더불어 20세기 초 조형미술을 혁명적으로 변혁시킨 선각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피카소는 형태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마티스는 찬란한 색으로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폭발하는 색채의 에너지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담는 마티스의 솜씨는 탁월했으며 그에게 색은 하나의 느낌이며 표현 요소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춤>은 마티스 특유의 활기찬 원색과 자유로운 리듬감의 표현으로 야수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초록색, 푸른색의 전면에 다홍색의 여인들, 세 가지 색만으로 3차원의 리드미컬한 춤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티스의 돋보이는 구성으로 <춤>은 세계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되었습니다.
맺음말
야수주의의 창시자이자 선구자였던 앙리 마티스는 사실 야수주의를 추구하던 시기는 길지 않았습니다. 말년까지 끊임없이 예술적 기법의 탐구를 시도했던 그는 '일생 동안 열정적으로 그림을 사랑한 화가'라는 명성을 얻었으나 "나는 균형 잡힌 순수한 그림만을 그리고 싶다. 지친 사람들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 같은 그림을"하고 말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