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 주도하던 20세기의 입체주의 가운데 화려한 곡선과 파스텔 색조를 사용하여 독창적 여성 초상화를 개척했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프랑스, 1883~1956)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생애
마리 로랑생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으나, 프랑스 파리의 평범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18세에 세브르에서 도자기화를 공부하고 파리로 돌아와 윙바르 회화연구소에서 소묘를 배웠습니다. 초기에는 로트렉과 마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고, 소묘를 배우며 만난 조르주 브라크를 통해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시인이며 영원한 애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시인 장 콕토(Jean Cocteau), 그리고 문필가며 최대 콜렉터였던 거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 등 예술계의 거물들과 교우하면서 당시 첨단적인 예술 분위기 속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입체파 화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여성 야수파'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로랑생은 여성스러운 섬세한 감성을 지키면서 색채와 형태를 단순화한 감각적이고 유연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습니다.
1912년 파리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인정받고, 1920년 로마의 개인전으로 성공한 여류화가가 되었습니다. 회화뿐만이 아니라 양탄자와 벽지 문양의 도안, 책의 삽화, 발레 무대장치, 의상 디자인까지 남성이 주도하던 당시 예술계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진로를 펼쳐나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인과 결혼으로 프랑스를 떠나 뒤셀도르프에서 살았으나 1920년 이혼한 후 파리로 돌아와 성공한 여성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다, 1930년대에는 사립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다가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작품
여성의 몸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입힌 선구자적 디자이너 코코 샤넬(Coco Chanel), 피카소가 '나의 유일한 여자친구'라며 인정했던 거투르드 스타인, 그리고 마리 로랑생은 동시대 파리에서 맹렬히 활동하며 교우했던 3명의 걸출한 여성 예술가이며 여류명사였습니다. 샤넬과는 1883년생 동갑내기이자 르 트항 블루(Le Train Bleu)라는 의상 디자인회사에서 같이 일하기도 했던 로랑생은 샤넬의 요청으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몽환적이고 우울한 눈빛의 샤넬은 한쪽 팔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이 자세에 맞춰 드레스는 스카프처럼 목선에서 내려와 한쪽 어깨와 가슴 부분을 비우고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로랑생 특유의 단순화된 신체의 느낌은 샤넬을 나른한 오후처럼 표현했습니다.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 흐릿하게 번진 경계선들, 가라앉은 분위기는 로랑생 그림의 전형입니다. 그림이 너무 몽환적이고 여성스러워서였는지 정작 샤넬은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맺음말
여류 예술가가 흔치 않던 시절에 당시의 어떤 예술운동에도 동조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켰던 로랑생은 항상 "나에게 진정한 재능이 있기를"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일본에 광적인 팬들이 많은 로랑생은 1983년 로랑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나가노현에서 로랑생 미술관을 건립할 정도입니다.